2011년 2월 27일 일요일

Couple Dynamics–사랑 ①

사람이 만나 짝을 이루고 유지하는데 요구되는 있다면?

사랑, , 그리고 존중 혹은 신용? 커플마다 작용 메카니즘이 다르니, 정도의 차이나 우선순위는 다르겠지만, 거의 모든 커플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밑천으로 거론되는 것들이다.
요즘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짝을 이루고 살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고, 꼭 그럴 필요도 없으니, 이런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져 있음을 광고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람마다 살아가는 법이 다르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짧은 소견과 경험을 확대해석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위험도 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중에, 부부 속사정은 부부 밖에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커플 작용 메카니즘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며, 다양하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커플의 작용 메카니즘 역시 기본적 속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고, 이게 돌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밑천이 같은지라, 이 밑천들이 커플역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보는  아주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개인적 호기심에 더하여, 관련분야 전문가들이 보이는 이에 대한 관심과, 앞서 살다 사람들이 남긴 글을 보면, 커플의 작용 메카니즘을 이야기하는데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는 있어 보인다.

커플 생성과 운용의 밑천인 사랑.
사랑은 커플역학에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작용할?

세기 아나키스트 문필가인 골드만(Emma Goldman) “Marriage and Love”라는 글에서, 결혼과 사랑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공통적인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서로 적대적이라 말한다. Goldman 따르면, 결혼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만들어진, 사랑과는 무관한 보험과 같은 사회제도일 뿐이다. 1950, 60년대, 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라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을 비판하며 이를 바로잡아 보고자 애썼던, 사회학자이며 사회심리학자로 불리기도 하는 프롬(Erich Fromm) 역시, 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에서, 결혼은 사랑과는 무관하게 시작된, 관습에 의한 사회계약이라고 한다. 나아가, 자본주의사회의 개화로 돈과 자유를 얻은 젊은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짝을 이루는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상품으로서 자신과 교환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만 사랑에 빠진다고 프롬은 지적한다.

그렇다면, 한 세기 그리고 세기 전과는 달리 결혼과 사랑을 하나의 패키지처럼 취급하는 요즘의 추세는 결혼과 사랑의 관계가 달라진 결과일까? 즉, 결혼은 이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로 맺어지는 제도적 장치가 아닌, 사랑을 매개로 사람이 만나서 일궈가는 삶의 방식이 되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프롬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짝짓기에도, 전면에 드러나지만 않을 뿐, 여전히 사회경제적 이해관계가 기본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결혼이라는 제도 혹은 삶의 방식은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양한 형태로 운용되어 왔고, 운용되고 있는 것이기에, 간단하게 일반화시켜 답할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서구사회에 있어, 결혼의 역사, 사랑과 결혼의 상관관계 결혼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진, 역사학자 쿤츠(Stephanie Coontz) 따르면, 젊은층 특히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결혼은 사회제도에서 개인의 취향, 사랑이 결혼의 중심에 서는 생활방식의  하나로 변화되어 왔다고 한다. 동시에, 결혼과 사랑의 결합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에 예기치 못한 변화를 몰고 왔다. 

2011년 2월 23일 수요일

Review–Science and Pseudoscience in Clinical Psychology


In presidential address to section III of division 12 in APA, McFall (1991) articulated the principle that “scientific clinical psychology is the only legitimate and acceptable form in clinical psychology.” While underpinning this principle, Lilienfeld et al. (2003) show the fear that scientific foundations in clinical psychology are eroding due to proliferation of scientifically unproven or questionable theories and techniques. The notion that clinical psychologists and practitioners, who are accountable for public health, should not apply pseudoscientific techniques is both desirable and indisputable. With regard to differentiating science from pseudoscience, however, the authors lead readers to keep questioning. 

Lelienfeld et al. gather essences of science from several scientists and philosophers. From original standpoints, the authors incorporate these essences into indicators of pseudoscience. Most indicators, which imply a scientist’s attitudes, are convincing. Nonetheless, whether psychologists can make use of falsification as a criterion for sorting out pseudoscience is questionable. When scientists apply strictly falsification from Popper’s standpoint, the range of science would get narrower (Pigliucci, 2010). In fact, Popper (1974) describes the psychoanalytic theories of Freud pseudoscientific and calls psychology qua science. Even Bunge (2006), who submits several features of science beyond falsification, classifies psychology as semi-science. Although this classification does not indicate that psychology is pseudoscientific, it implies that psychological science has characteristics different from hard science like physics. A question derives from this point. Is it reasonable to employ falsification from Popper’s standpoint, which could bring about controversy, when psychologists judging theories and techniques in psychology for weeding out pseudoscience? The authors render ad hoc hypothesis, which derives from falsification, instead of directly suggesting falsification as a criterion. This confusing inquiry leads another question. How precisely can scientists tell science from pseudoscience? McNally (2003) points out that the boundary between science and pseudoscience is not clear-cut. Although Pigliucci appreciates attributes of science, he also notes that “science is characterized by fuzzy borderline with other types of inquiry that may or may not one day become science.”  This comes up with the concern that imprudent classification can lead science to dogmatism. Hence, despite fatal consequences of pseudoscience, it does not look advantageous to sort out pseudoscience according to criteria which entails controversy.

Considering history of psychology, move to pursue science like EST (Empirically Supported Treatment) movement which looks like self-defensive response is reasonable. Nonetheless, emphasis on research and practice based on empirical evidence entails a concern. The emphasis tends to reduce scientific knowledge to method like experiment in laboratory. History of science illustrates that sifting science according to strict criteria or community interest could impede new findings. As heliocentric theory, theory of relativity, and studies of brain plasticity show, new evidence has overturned established beliefs. On the other hand, some theories of philosophy of mind, which mainly deal with unobservable phenomena which rarely provided empirical evidences, have evolved toward cognitive science due to findings from neuroscience (e.g., Schwartz’s therapy for OCD). Those examples don’t justify the fact that clinicians practice based on questionable techniques which might bring about harm, nor do the examples deny that there is distinctive quality of science. Psychology is recognized as a soft science because it deals with “complex layers of causality” different from hard science (Pigliucci). From this perspective, too much emphasis on empirical evidence, especially randomly controlled trials, might distort characteristics of psychology, which involves human behavior and mental process with complex layers of causality. 

References
Bunge, M. (2006). The philosophy behind pseudoscience. Skeptical Inquirer, 30 (4), 19-27.
McFall, R. M. (1991). Manifesto for a science of clinical psychology. Clinical Psychologist, 44, 75-88.
McNally, R. J. (2003). The demise of pseudoscience. The Scientific Review of Mental Health Practice, 2 (2).
Pigliucci, M. (2010). Nonsense on stilts: How to tell science from bunk. Chicago, IL: University of Chicago Press
Popper, K. R. (1974). Intellectual autobiography. In P. A. Schilpp. (Ed.), The philosophy of Karl Popper (3-181). La Salle, IL: The Open Court Publishing.
Schwartz, J. M., & Begley, S. (2002). The mind and the brain: Neuroplasticity and the power of mental force. New York, NY: HarperCollins.
Young, L. J. (2005). EST, MCE, MCC: The abbreviating of psychologyRetrieved from http://www.academyprojects.org/young.html

2011년 2월 19일 토요일

Book Review-50 Great Myths of Popular Psychology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현상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을까? 관찰가능한 객관적 증거를 추구하는 과학적 지식이라는 것도 언제든지 오류로 밝혀질 있음을 감안하면, 낙관적인 대답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관련 주제 글을 뒤적여 봐도 그 의문은 더 커갈 뿐이다.
50 Great Myths of  Popular Psychology (S. Lilienfeld et al.). 이것 역시 이런 의문에 더한 의문을 갖게 하는 정보를 한아름 담고 있는 책이다. 첫 장을 넘기기가 무섭게, 제목이 암시해주듯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졌지만, 과학적 근거가 없거나 과학적 연구 결과와는 상반되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이론 혹은 가설들이 폭로되어 나온다. 저자들은, 2010 현재, 미국학계 내에서 주류라고 주장하는 과학커뮤니티에서 인정하고 있는, 과학적 검증을 거친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연구의 결과를 그 판단의 근거로 제시한다. 

저자들이 밝혀 놓은, 그릇된 통념이지만 대중 사이에 신빙성있는 심리학 지식으로 회자되고 있는 몇 몇 가설 혹은 이론들은, 그동안 교실 혹은 등에서 듣고 보아 막연히 진실이겠거니 여겨 왔던 것들이어서, 놀라움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에 언급되어 있는 이슈들 대부분은, 그동안 편견을 조장 혹은 재생해온 이론이나 가설들이 진실이 아니었음을 확인해 주는 과학적 연구 결과물이다다른 한편, 학파들간에 논쟁거리가 되어  이슈에서는,  책의 저자들 역시 confirmation bias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주제 37. 이 책에 언급되어 있는 이슈 외에도, 사회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그릇된 심리학 지식이 적지 않음에도,어떤 이유에서든 여기 있는 50가지를 선택했다는 것은, 저자들 나름의 가치판단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책이 제시하고 있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가 아전인수식으로 분석될 있다거나, 분석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 진행된 심리학 및 관련 분야에서의 연구에 기반해 볼 , 몇 주제를 제외하고는, 논란의 여지가 거의 없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많은 주제가, 자신과 다른 생물학적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문화나 사회에 있는 인간에 대한 편견을 고착화시키는 전제들을 뒤엎는, 비교적 객관적인 실험결과를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 메세지를 담고 있다.

이 책은 제목에서부터 일반독자의 관심을 끌고자 하는 의도를 분명하게 보인다. 즉, 잘못 알고 있는 인간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정보가 보통사람들의 삶에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영향을 미친다는 암시를 하고 있다. 보통 40 혹은 50대에 중년의 위기가 찾아온다 하더라. ‘모짜르트 음악을 어렸을 듣고 자라면 머리가 좋아진다 하더라. '마음의 병이 있는 사람 대부분은 폭력적이다'고 하더라. 이게 그릇된 정보임에도 신빙성있는 지식으로 알고 있다 해도 크게 해가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릇된 사회적 통념을 이용해 사람을 조종하는 집단이 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히 사회적 편견을 조장하거나 상품을 파는 전략으로 이용된다면, 이를 믿고 따르는 대중 혹은 소비자에 물질적 손해는 물론 정신적 침해가 적잖게 따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 있는 과학적 연구의 결과라는 것들도 언제든지 오류로 드러날 있음을 잊어서는 된다. 저자들은, 과학적 실험으로 검증된 지식이 가장 믿을 있는 지식이라는 전제에서 연구를 시작하고 분석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들은 이 책에 있는 연구의 결과들도 언젠가는 잘못된 가설에서 시작된 것으로 밝혀질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는데 인색함을 보인다. 어느 지식이든, 엄격한 과학적 검증을 거친 지식이라 해도, 어느 순간 죽은 지식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과학자의 겸허가 아쉬워 보인다. 관심이 있다면 읽어는 보되, 주제는 관점에 따라서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음을 간과하지 않아야 한다. 특히 #15, 37, 그리고 47 주제는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 책을 읽게 데에는, 책의 저자들이 편집한 Science and Pseudoscience in Clinical Psychology (Lilienfeld et al.)라는 책이 계기가 되었다. 책에 있는 저자들의 글을 보면 이들의 관점이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Review of chapter 1 of the Book, Science and Pseudoscience in Clinical Psychology

2011년 2월 13일 일요일

허수아비가 보는 세상 2


허수아비가 엿보는 인간세상 이야기, 번째



No entry, keep off please, or keep on main trails please.
산행길에 흔히 있는 푯말이다.
이유가 뭐든, 길이 아닌 곳을 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근래 산행을 할 때마다, 그런 사람을 적어도 한 번씩은 본다.   
사실, 누가 뭐래도 어떤 길을 택하느냐는 개인에게 달려있다

  1. 푯말을 무시하거나
  2. 상식을 따르거나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 따른 결과의 경우의 수는 무한하다.
초등학교 바른생활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삶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여기 있는 단 두 컷의 그림으로 이야기를 엮는다 해도, 이야기를 엮어가는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   *   *   *   *


*덧붙이는 말
상식을 따라 살아온 삶이, 시각에 따라 실패자의 삶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면 왜 사람이 상식이나 사회적 약속을 배우고 지키며 사는 것일까? 남의 이목 때문에? 하지만 상식을 따르는 삶이 남보기에 결코 성공한 삶이 아닐 경우가 허다하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아니면, 통제 메카니즘에 길들여져서?
남보기에 좋아 보이는 삶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교실에서 헛 것을 배웠다.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가식을 가르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선생님들이 진심으로 학생을 위해 도덕을 이야기하고, 사회적 약속을 지킬 것을 당부했을까? 정말 궁금하다. 단지 통제하기 쉽다는 이유만으로 하지 않았길 바라본다. 나 역시 상식과 사회적 약속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 왔고, 지금도 이에 어긋난 행동은 맘을 심히 불편하게 하지만, 남에게까지 사회적 약속을 지키며 살라고 할 명분을 대지 못하겠다. 


2011년 2월 7일 월요일

인식과 편견 2 – Screened Audition in Orchestra


편견없이 우열을 가려보고자 하는 다른 시도가 있다. 오케스트라 연주자 오디션에서, 연주자와 심사자 사이에 장막을 치는 것이다. 심사자가, 장막 뒤에서 연주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남자인지 여자인지, 키가 큰지 작은지, 아무것도 모른 악기 소리에만 귀기울이게 하자는 의도다. 판단대상 외적 요소의 영향력을 막아보고자 시도되었다는 점에서장막 오디션은 콜라의 블라인드 테스트와 같은 맥락에 있다하지만 둘은 다른 결과를 남겼다.

프렌치 호른이라는 관악기가 있다. 모양새부터 묵직해 보이는 것이 힘이 있어야 다룰 있어 보이는 악기다. 고정관념적으로 말해 남성의 악기인 셈이다. 그렇다고 여성 연주자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뉴욕 Metropolitan Orchestra 그리고 워싱턴 디시 National Symphony Orchestra에는 여성 프렌치 호른 연주자가 있다. 하지만 이들 여성 연주자들이 그 자리에 앉게 되기까지, 소수자 권리획득의 역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구자의 투쟁이 있었다.  

장막 오디션을 도입하면서, 전반적으로 오케스트라에 여성 연주자 수가 늘었고, 남성의 영역이라고 여겨져 왔던 프렌치 호른, 트롬본과 같은 관악기 부분에 여성 연주자가 하나 늘기 시작했다고 한다. 보수적인 클래식 음악에 있어 혁명이라 불리울 정도의 변화를 불러일으킨 이 장막 오디션은, 사회적으로 뿐만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오케스트라에 질적 변화를 가져왔다는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콜라의 블라인드 테스트가 현실에서 외면을 당한 반면, 오케스트라 장막 오디션은 성공을 이루었다 같은 컨셉의 시도가 다른 결과를 가져왔을까? 청각도 다른 기관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기능을 수행하는데, 장막 오디션의 결과는, 콜라가 소비자를 실망시킨 것과는 달리, 청중을 만족시켰을까? 가장 쉽게 생각해낼 있는 대답은, 콜라와 오케스트라 연주가 이를 즐기는  사람들과 작용하는 메키니즘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콜라는  소비자들과 일상적으로 친밀하게 만난다. 이에 비해, 오케스트라 연주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연주자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연주장에서 직접 보고 들으며 분위기를 느끼면서 듣거나, CD 같은 매체를 통해서 귀로만 듣거나, 듣는자와 연주자와는 직접적 상호작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게  오케스트라 음악과 청중이 만나는 맥락인 것이다.  

• Discussion Point: 
콜라의 블라인드 테스트와 오케스트라의 장막 오디션은 인간의 인식과 편견에 대한 관계를 되짚어 보게 하는 사건들이다그리고 편견과 진실간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생각에 의문을 갖게 한다. 편견없는 인식이 무엇이고 편견이 낀 인식이 무엇인지, 과연 우리는 구별할 수 있을까? 시간을 두고 곰곰히 생각해 봐야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