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만나 짝을 이루고 유지하는데 요구되는 게 있다면?
사랑, 돈, 그리고 존중 혹은 신용? 커플마다 작용 메카니즘이 다르니, 정도의 차이나 우선순위는 다르겠지만, 거의 모든 커플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밑천으로 거론되는 것들이다.
요즘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짝을 이루고 살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고, 꼭 그럴 필요도 없으니, 이런 걸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져 있음을 광고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람마다 살아가는 법이 다르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짧은 소견과 경험을 확대해석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위험도 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부부 속사정은 부부 밖에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커플 작용 메카니즘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며, 다양하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짝을 이루고 살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고, 꼭 그럴 필요도 없으니, 이런 걸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져 있음을 광고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사람마다 살아가는 법이 다르다 보니, 자칫 잘못하면 짧은 소견과 경험을 확대해석하는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를 위험도 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중에, 부부 속사정은 부부 밖에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커플 작용 메카니즘은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며, 다양하다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커플의 작용 메카니즘 역시 기본적 속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고, 이게 돌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밑천이 같은지라, 이 밑천들이 커플역학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보는 게 아주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개인적 호기심에 더하여, 관련분야 전문가들이 보이는 이에 대한 관심과, 앞서 살다 간 사람들이 남긴 글을 보면, 커플의 작용 메카니즘을 이야기하는데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는 있어 보인다.
커플 생성과 운용의 한 밑천인 사랑.
사랑은 커플역학에 어떤 위치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한 세기 전 아나키스트 문필가인 골드만(Emma Goldman)은 “Marriage and Love”라는 글에서, 결혼과 사랑은 사람들이 보통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공통적인 게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서로 적대적이라 말한다. Goldman에 따르면, 결혼은 경제적 이해관계로 만들어진, 사랑과는 무관한 보험과 같은 사회제도일 뿐이다. 1950, 60년대, 자본주의의 성장에 따라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을 비판하며 이를 바로잡아 보고자 애썼던, 사회학자이며 사회심리학자로 불리기도 하는 프롬(Erich Fromm) 역시, The Art of Loving이라는 책에서, 결혼은 사랑과는 무관하게 시작된, 관습에 의한 사회계약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사회의 개화로 돈과 자유를 얻은 젊은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짝을 이루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 이들은 상품으로서 자신과 교환가치가 있는 사람을 만났을 때만 사랑에 빠진다고 프롬은 지적한다.
그렇다면, 한 세기 전 그리고 반 세기 전과는 달리 결혼과 사랑을 하나의 패키지처럼 취급하는 요즘의 추세는 결혼과 사랑의 관계가 달라진 결과일까? 즉, 결혼은 이제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로 맺어지는 제도적 장치가 아닌, 사랑을 매개로 두 사람이 만나서 일궈가는 삶의 한 방식이 되어버린 것인가? 아니면, 프롬이 지적하는 것처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짝짓기에도, 전면에 드러나지만 않을 뿐, 여전히 사회∙경제적 이해관계가 기본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결혼이라는 제도 혹은 삶의 방식은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다양한 형태로 운용되어 왔고, 운용되고 있는 것이기에, 간단하게 일반화시켜 답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서구사회에 있어, 결혼의 역사, 사랑과 결혼의 상관관계 등 결혼의 사회적 의미에 대한 연구로 잘 알려진, 역사학자 쿤츠(Stephanie Coontz)에 따르면, 젊은층 특히 여성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상승하면서 결혼은 사회제도에서 개인의 취향, 즉 사랑이 결혼의 중심에 서는 생활방식의 하나로 변화되어 왔다고 한다. 동시에, 결혼과 사랑의 결합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모두에 예기치 못한 변화를 몰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