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10여년 전 일로 기억된다. 소위 말하는 IMF 구제금융으로 한국사회 전체가 몸살을 앓으면서, 이민 붐이 일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캐나다로 이민을 떠난 누군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들었다. ‘여행객으로 와서 잠시 머무를 때에는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던 벤쿠버 (Vancouver)의 풍경과 사람 사는 모습이, 막상 가서 먹고 사는 걸 걱정하다 보니, 이젠 더이상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고, 풍경같은 것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고. 오래전 스쳐지나가며 들은 말이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현실의 답답함이 묻어나던 그 사람의 말과 표정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여행은, 먹고사는 일상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 나와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 여행지의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한발짝 물러나 볼 수 있는 방관자의 눈을 준다. 6년 전 여행길에 잠시 들렸던 Capitola. 이곳에서 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보지 못한 것일까?
2004년 여름, 목적하는 바를 이루고자 했던 3년간의 칩거에 가까웠던 생활을 마무리하고, 아무 생각없이 짐을 꾸려 떠났다. 4일간의 외출. 하지만 내게 4일간의 외출은 목마른 자에게 주는 딱 한 방울의 물과도 같이 더 심한 갈증을 느끼게 했다. 게다가 여행에서 돌아온 서울은 말그대로 살인적 더위로 녹아나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떠난 여행. 그 여행에서 난 Capitola라는 도시를 만났다.
내가 Capitola를 처음 찾은 건, 그 해 두 번째 떠난 여행을 시작한 둘쨋날, 7월의 한여름 태양이 기운을 잃어가던 늦은 오후였다. 막 바다에서 해수욕을 하고 나온 듯한 사람들 몇 몇이 주차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나와 동행한 한 사람, 우리 둘은 그들이 걸어 들어온 거리로 나갔다. 내가 흔히 알고 있던 한여름 바닷가 도시와는 달리 차분하게 정돈된 마을이 눈에 들어 왔다. 평일의 늦은 오후여서 그랬을까? 조용하다 못해 쓸쓸한 기운이 발길에 묻어 올라 왔다. 길 양 옆으로 제법 깔끔하게 차려 놓은 작은 갤러리가 군데군데 보이는 것 외에, 바닷가로 이어지는 길은 이 근처 작은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하지만 모래사장으로 이어지는 길 모퉁이에 서있는 한 옷가게를 돌아 서자, 생각지도 못한 풍경이 펼쳐졌다. 태양이 검붉게 물들어 가는 바다를 배경으로 재즈가 흐르고, 사람들은 바람 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매해 6월 말부터 9월 초까지 매주 수요일 해질 무렵이면,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그들만의 이야기를 엮어 갈 수 있는 무대가 마련된다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내가 우연히 찾아간 날이, 마침 그 중의 하루, Jazz Concert가 있던 날이었고, 덕분에 나는 재즈가 있어 더욱 낭만적인 해질 녘 한여름 바닷가에서, 여행객의 정취를 맘껏 맛 볼 수 있었다. 나와 동행인은 사람들 속에서 나와, 그들을 배경으로 바다로 향해 나 있는 나무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우린 그렇게 앉아서, 한 여름밤 풍경의 한 자리를 채웠다.
그날 나와 동행한 사람은, 내 아는 이의 부탁을 받고, 호의로 나를 그곳까지 안내해 주러 온 것이었다. 서로 얼굴을 본지 두 번째 되는 날이기도 했고, 그날 분위기가 주는 자유로움 때문이었는지, 그렇게 한참을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낯섬이 자연스레 털려나가고 있었다. 다른 문화에서 오랜 시간 살아왔지만, 내 오랜 친구들보다 나와 비슷한 시각에서 사물과 사람을 보고, 이해하고 있다는 것에 난 적잖게 놀랐다. 해가 완전히 물속에 잠겨버리자, 바다도 하늘도 제 색깔을 잃고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여름이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 한참을 있다 보니, 찬기가 몸속까지 스며드는 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날의 마지막 노래를 들으면서, 몸 녹일 곳을 찾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라솔이 아직 접혀지지 않은 deck 위에서, 스낵과 음료로 그날의 축제를 마무리하고 있는 사람들을 지나, 우리는 내 위가 감당할 수 있는 음식이 있을 것 같아 보이는 한 Italian café 로 들어갔다. 사람들도 적당히 있고, 바다로 나 있는 창으로 점점 더 짙어져 가는 밤바다를 보며 오늘을 정리하면서 저녁을 먹기에 그런 대로 괜찮아 보였다. 두 번째 보는 사람들끼리 뭐 그리 할 얘기가 많았는지, 이야기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Capitola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난 그 다음해 7월, 다시 Capitola를 찾았다. 그날도 모래사장에선 concert가 있었고, 바다는 여전히 낮동안 달구어져 있던 태양의 열기를 삭히며 검붉게 변해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제 각기 음악이며 바다며 바람이며, 그날의 모든 누릴 수 있는 혜택을 맘껏 즐기고 있었다. 나는 눈과 귀와 내가 가진 모든 감각을 있는 대로 다 열어 놓은 채, 지난 여름의 흔적을 쫓아 보았다. 여행객으로 우연히 들렸던 Capitola. 하지만 더 이상 낯 선 여행지가 아닌 이 도시의 여름 밤이 내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올 것인지 알고 싶었다. 이 날도 그 전 해 동행했던 사람이 함께 해 주었다. 하지만 그는 단순한 동행인으로 나를 따라나선 건 아니었다. 그와 나는, 지난 해 우리가 만들어냈던 이야기의 흔적을 찾아 하나하나 따라가 보았다. 같은 모래사장을 걸어, 같은 나무의자에 앉아, 같은 바다를 바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같은 café의 같은 자리에 앉아 먹은 저녁. 음악이 바뀌고 café의 음식 맛이 달라진 것만 빼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리고 우린 또 그 다음 해 7월에도 Capitola를 찾았다. 이번엔 많은 것이 달랐다. 그날은 Rock이 있었고, 날씨마저 Rock에 맞게 뜨거웠다. 그날 Capitola의 밤은 내 기억에 있던 느낌과는 사뭇 다르게 다가왔다. Café도 다른 곳을 찾았다. 저녁을 먹고 다시 바다로 나가 보았다. 음악도 없고, 춤추는 사람도 없는 Capitola의 밤바다는 조용했다. 남편과 나는 찬 기운을 이기지 못할 때까지 하늘과 하나로 검게 이어진 바다를 바라보았다.
지난 두 해 동안, 아쉽게도 Capitola를 찾지 못했다. 3년 전, 여전히 여행객의 기분으로 살아가던 때여서 그랬을까? 아주 미세한 부분의 느낌은 달랐지만, 아직도 Capitola는 내게 낭만의 도시로 남아 있다. 언젠가 내가 더이상 여행객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는 날이 오면, 그 낭만은 퇴색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올해 7월에도, 내년 그리고 내 후년에도 그곳에 가 볼 것이다. Capitola 여름밤이 전설이 될 때가지 나의 방문은 계속 될 것이다.